40년 만에 전시관 겸한 인장연구소 설립 숙원 풀어
지름이 보통 1.5cm, 이름을 새겨 넣는 손톱만한 인장(또는 도장) 공간에도 만든 사람의 글씨(書)와 그림(畵), 조각의 창작 혼이 스며있다. 최병훈 (59) 대한민국 인장공예 1호 명장은 인장분야가 1급 기능사의 한계를 뛰어 넘어 명장이 될 수 있도록 처음으로 길을 터놓은 인장공예의 대가(大家)이며 대표 장인이다.
어릴 때 서당에서 공부한 덕분에 한문에 대한 이해력이 깊고 글씨도 한글과 한자 모두 서예가 수준의 독자적인 경지를 확보해 1976년 인장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인장업계에서 돋보이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는 인장을 새기며 살아온 지 40여년 만에 자신이 사는 동네인 서울 수유동 293-3번지 4.19 탑 부근에 있는 2층짜리 상가 건물을 사들여 전시장, 기념관, 후진양성 등을 겸한 다목적 최병훈 인장공예연구소를 설립했다. 올해 안에 문을 열 계획으로 지금 한창 내부 수리를 하고 있다. 전시 작품 중에는 조선왕조 때의 어보(御寶)와 중국 왕조시대의 어보 자료를 비롯해 자신의 전각 작품과 상형문자를 돌에 새긴 창작 작품 등 수백 점이 포함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인장과 관련된 그의 학구적인 열성과 평생을 두고 탐구하고 수집한 역사적인 기록들이다. 덜 먹고 덜 놀면서 모았다는 돈으로 중국 대만 일본 등지를 수시로 찾아가 역사 자료와 현대적인 변천사를 찾아내고 배우는 인장여행을 반복해 왔다. 국내서도 젊은 시절에는 선배 장인들의 솜씨를 비교 분석하기 위해 150여 개 인장업소를 찾아다닌 이력이 있다.
서명 문화가 일상화 되면서 인감제도의 페지론까지 등장하고 있지만 인장을 작품 세계로 생각하며 외길의 삶을 살아가는 여원(如原) 최병훈 명장에게 인장공예는 여전히 우리가 지켜가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전통예술의 한 부문이다.
도장(圖章)이나 인장(印章)이란 말은 같은 뜻으로 불리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의 이름이나 공사(公私)기관의 이름 또는 문양을 새겨 문서에 찍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도장이나 인장인데, 인(印)이란 조(爪 손톱조)자와 절(卩/節 한자부수의 하나인 병부절의 약자)이 합친 글자입니다. ‘손으로 찍어 질병과 액운을 없앤다’는 뜻이 내포돼 있습니다. 인장이라는 단어는 백성들이 쓰던 인(印)과 관리가 쓰던 장(章)이 합쳐져 생긴 말이지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전각분과위원장을 역임하셨는데 인장의 한 분야인 전각이 미술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전각(篆刻)은 전서(篆書)를 조각한다는 말입니다. 주로 글자(書)와 그림(畵)의 낙관인에 많이 쓰이며 낙관인은 작가가 직접 새기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작가의 서법이나 화법, 가치관을 잘 이해하고 작가의 취향에 맞게 새기는 것이 기본입니다. 낙관용 인장은 주로 두인, 성명인, 아호인까지 3개를 한 세트로 제작하며 서화문인들이 작품을 완성한 뒤 자신의 창작품 표식으로 사용합니다. 인장 공예는 1970년대에 기능분야로 분류되다가 1980년대로 넘어서면서 서예부문과 연계가 되었습니다. 인장은 기능분야의 최고 명예인 명장제도에도 포함되지 않았으나 2001년에 인장도 포함이 됐어요. 명장 심사를 앞두고 내가 버리지 않고 보관해둔 전각 작품 자료 1천여 점을 제시했을 때 관계 공무원들이 모두 놀라더군요. 서화는 예술이고 인장은 기능으로 인식이 됐으나 인장의 창작세계에는 서화가 포함됩니다. 오히려 원시시대 암각화를 인장의 시초로 보는 시각에서 생각하면 서화보다 앞선 문화입니다.
인장공예 1호 명장이신데, 그 이전에 전각의 달인으로 신지식인에 선정되셨지요?
그게 1999년입니다. 인장공예기능사 1급 때였습니다. 대한민국미술대상전을 비롯해 국내외 미술전에서 대상이나 금상, 국무총리 표창 등 각종 상만 70여회 받은 것 같아요. 그 혜택을 갚으려고 내가 일하는 서울 강북구청 앞 대여섯 평짜리 점포에 인장공예연구소 간판을 달았지만 제대로 된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어요. 절약하며 살아와 이제 박물관이나 전시관을 겸할 수 있는 건물 한 채(서울 수유동 293-3번지)를 장만해 꿈을 이룬 것이지요. 이곳에서 서예나 전각을 가르치고 전통 인장 공예와 관련한 연구사업을 할 계획입니다.
인장업은 정말 수입에 큰 변수가 없고 땀 흘린 만큼 돈을 만지는 분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돈이 안되는 직업이지요. 평생 아끼고 덜 먹고 덜 입어야 돈이 모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을 손에 잡으셨어요?
나는 전북 장수군에 있는 팔공산 산골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한자든 한글이든 글씨를 잘 썼어요. 아버지가 쉰 살에 늦둥이로 나를 낳으셔서 6살 때부터 서당공부를 시켰어요. 천자문 떼고 명심보감까지 배웠어요. 다시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아버님 타계하시고 못 다한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 와서 서울 종로 5가에 있는 한국서예학원에 사동으로 취직을 했어요. 밤낮 서예 공부하는 사람들 틈에 살다보니 붓글씨를 배울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는 글씨를 잘 쓰면 필경사로 일할 수 있었는데 중앙여고에서 군대갈 때까지 학교의 각종 문서나 시험지 등의 등사용 원판 글씨를 썼어요. 그때는 일본말로 가리방을 긁는다고 했지요. 군에 입대해서도 행정병으로 온종일 철필을 잡고 등사용 원판 글씨를 썼답니다.
제대하고 내 글씨를 활용하는 직업으로 인장기술이 맘에 들었어요. 손재주도 있었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또 자본 없는 사람에게 아주 적당한 직업이었지요.
단순히 이름만 새겨주는 도장에 머물지 않고 전각 같은 작품 공예에 관심을 둔 때는 언제부터입니까?
나는 우리나라 인장공예의 역사와 뿌리가 모두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해도 지난 세월을 통해 우리는 우리만의 고유한 전통과 창의성을 보여 왔습니다. 나는 젊을 때부터 틈만 나면 중국과 일본 대만 등지로 인장 여행을 했습니다. 기능사 자격을 갖게 되면서 창작에 대한 열정도 따르고 전각에 대한 기록도 찾아보고 싶었지요. 사실 우리의 인장문화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된 정부의 초기부터 관공청의 필요성에 의해 필수도구로 대중 속에 넓게 자리를 잡았어요.
우리나라 전각의 역사 기록에는 어떤 인물들이 등장합니까?
조선 세종의 셋째 아들로 서예와 시문에 능했던 안평대군(1418-1453년)의 전각이 남아 있어요. 3.1운동 때 33인중의 한 분인 오세창 선생(1864-1953년)도 전각의 대가였습니다.
중국은 안평대군보다 후세인 1497년 서예가 문팽(文彭)이 아버지가 가져다 준 돌을 소재로 새긴 전각이 시초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각용 돌은 철분이 없는 돌을 써야합니다.
최근 문화재청이 재미동포로부터 구입한 고종황제의 옥새가 공개되어 관심을 모았습니다. 일부 뉴스에는 옥새를 어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다같이 임금의 도장을 뜻하지만 임금이 문서에 사용하는 국새(또는 어새)와 달리 어보는 왕과 왕비의 존호를 새겨 종묘에 안치한 의례용입니다. 제례를 지내면 먼저 어보를 앞장세웁니다. 이번 고종황제의 옥새는 외교문서인 친서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조선시대에는 용도에 따라 옥새도 교지용 지방관리임명장용 과거시험용 서적하사용 궁궐수비문서용 등으로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재미있는 기록은 우리 선조도 오래전에 도장이 아닌 사인을 한 사실입니다. 서양은 펜을 사용했지만 우리는 고려 때부터 수결(手決)이라고 해서 붓으로 가로 선을 긋거나 꽃모양이나 손을 그려 넣기도 했어요. 고종황제도 생년월일을 상징하는 사인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인장의 용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 같습니다.
서명이 편리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서명은 아무리 정교하게 해도 같을 수가 없습니다.아침 저녁에 한 서명이 다르고 몸의 컨디션에 따라 차이가 나타나며 나이가 들면서 변하기도 합니다. 증거로 활용할 때도 쉽게 모조할 수 없는 인장이 유리합니다.
좋은 인장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컴퓨터에서 글자를 뽑고 기계로 깎는 것은 가치가 없지요. 재료선택에도 차이가 있지만 새기는 사람의 창의성과 손맛이 베인 인장이 역시 가치가 있습니다.
인장 재료도 목재에서부터 옥이나 수정, 상아 등 다양합니다. 어떤 재료가 이상적입니까?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지만 나는 나무가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칠을 하지 않고 생긴 그대로의 모양을 살려 손으로 문지르며 새기는 목도장이 가장 정감이 갑니다. 인장 재료로 쓰이는 나무는 회양목 박달나무 돌배나무와 먹감나무 속, 앵두나무나 대나무 뿌리, 대추나무 등이 대표적입니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인장이나 목걸이를 만들면 행운이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벼락을 맞은 대추나무가 있을 수도 있지만 흔치 않습니다. 대추나무가 벼락을 맞으면 검고 단단하게 바뀝니다. 물에 넣어도 가라앉아요. 그걸 구하기 어려워 염분을 흡입시킨 나무를 기계로 압축해서 사용을 해요. 원래 벼락이 떨어진 나무로 염주나 목탁을 만들었어요. 그 목탁은 맑은 쇳소리가 납니다.
복도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료나 글씨체 등으로 행운이 깃들게 한다는 도장이 한 때 유행을 했던 것 같습니다. 말이 되는 얘기인가요?
복도장이라면 아마도 인감도장을 그렇게 새기는 경우겠지요. 인감도장이란 사용해서 잘되면 본전이고 잘못되면 손해 보는 일밖에 없지 않습니까? 부동산 등 무엇을 매입할 때는 그 도장이 없어도 되지만 팔 때는 꼭 필요한 도장입니다. 또 보증을 설 때도 있어야 하고. 멋있는 도장으로 남의 기를 죽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체로 책임을 지는 증거물로 사용하는 문서용 인장을 복과 연관 시키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닌가요?
그동안 새기신 인장들 전시자료를 보니 글씨체는 주로 전서와 상형문자 형태가 많군요.
상형문자는 종이가 나타나기 전에 사용하던 문자입니다. 붓의 문자로 볼 수 있는 예서 초서 횡서보다 전서나 상형문자체는 그림처럼 예쁘고 운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인장을 만드는 일은 주문한 분을 앞에 두고 함께 의견을 나누며 재료나 글씨 등을 결정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1.5cm의 공간에 집 한 채를 세운다는 생각으로 조각칼을 잡아야 좋은 작품이 나옵니다. 한치의 공간이지만 우주를 끌어들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인장을 새겨 준 분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명사도 많지요?
많습니다. 장관들도 여러 분 있었고. 그런데 본인이 오지 않고 남을 시켜 새겨 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럴 때는 내 스스로가 기계처럼 일할 수밖에 없지요. 주문을 받아도 불쾌한 생각이 들어요. 돈을 더 준다 해도 그렇게 고맙지도 않고.
인장업을 하시면서 겪은 일중에는 남다른 얘기도 많지요?
바로 인장을 필요로 하는 본인이 나타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남의 인장을 주문할 때 부딪히는 불쾌감은 옳지 못한 일에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도 따릅니다. 언젠가 어느 도시의 시장 관인을 새겨달라는 분이 찾아왔어요. 나는 그것을 새겨주는 대신 경찰의 입회하에 신분을 확인하고 전달하겠다고 했어요. 그는 화를 내며 욕까지 하고 사라졌는데 얼마 후 신문을 보다가 나를 찾아온 사람이 경찰에 붙잡힌 기사를 읽었어요. 시장 허가장을 위조해 모래골재 채취를 하다가 붙잡힌 사건이었어요. 그런 일도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중동 근로자 파견시대에는 고졸 이상의 학력이 필요해 고교교장 직인을 위조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주 내놓고 남의 인감증명서를 가져와 그대로 파달라는 사람도 간혹 나타납니다.
작품 전시를 겸한 연구소를 마련해 평생 숙원을 푸셨는데 다음 꿈은 무엇인가요?
내 스스로도 꾸준히 공부를 하며 틈틈이 주변사람들에게 서예와 인장 공예를 가르치고 싶습니다. 다른 분야의 인간문화재와 명장 분도 서예를 하고 싶다며 나를 찾아오십니다.
자녀 분 중에 인장공예의 전수후계자는 없는지요?
큰 아들은 토목과를 나왔고 둘째는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셋째는 대학 졸업하고 직장에 다닙니다. 후계자가 없어요. 그래서 자료나 전시 작품을 나중에 어떻게 할지 고민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인장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을 보며 전통문화의 위대한 힘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경기장마다 전각으로 한 로고들이 화려하게 나부꼈습니다. 우리도 식어가는 인장공예의 맥을 제대로 살려가야 하는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지금부터 내가 가야할 길이 시작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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